제목: ((퍼온글)) Franz Liszt(1811 - 1886), 리스트의 생애와 음악
이름: * http://www.metalman.co.kr


등록일: 2011-08-12 02:52
조회수: 4245 / 추천수: 1016



지난 봄...

친구(?)라 스스로 칭하신 분께서 레코드가게에서 골라주신 리스트의 음반과

차이코프스키의 음반 ... 그리고 선물로 사주신 음반 등등.

얼마전부터 피아노에 흠뻑 빠져있던 내게 리스트를 듣냐고 물어보셨고,

리스트는 왠지 어려울 것 같아서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 하니.

나랑 잘 맞을 것 같다시며, 리스트 음반을 골라주셨다.

리스트를 들으며,

내가 좋아하던 쇼팽의 끝없이 빠져들어 허우적이게 하는 감성과 달리

적당한 긴장감으로 화장되어진 풍부한 우울과 감성.

그리고....  아름답게 완성된 리스트의 광기를 엿볼 수 있었다.

어쩌면, 그토록 내가 헤어나오지 못하도록 빠져있게 하던

끝없는 나락의 축축하고 끝없는 감성으로 끌어내리던 쇼팽보다

리스트가 더 달콤하게 느껴지면서,

나의 삶에 더 닿아있지 않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마침 그 음반을 골라주신 친구와의 통화로 리스트의 생애을 여쭈었더니.

리스트의 생애는 그의 음악만큼이나 자유로왔고, 굴곡이 많은 예술가의 삶이었다고 하신다.

난 " 그렇다면, 참 아픔이 많았겠네요. 그거 당사자는 굉장히 아픈건데...."라며 말끝을 흐리며 웃었다.

그래서 리스트의 삶과 생애를 자세히 알고 싶었고,

좋은 글을 발견하게 되어.

다른 이의 글이지만, 리스트의 생애를 담아본다.

좋은 글을 주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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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 곳)) 박천수음악카페



예술가를 영웅으로 하는 개념은 낭만주의사상의 중핵이었다.

1827년에 베토벤의 초인적인 작업에 종지부가 찍혔을 즈음,

젊은 날의 모차르트가 불경죄로 비난을 받은  일이나,

나이든 하이든이 런던의 상류계급으로부터 당연한 박수와 경의를 받았다고  해서

놀라 눈을 휘둥그렇게 뜨던 시대는, 먼 과거의 일이 되고 말았다.



예술가를  보호한다는 제도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낭만주의 운동이 공화정체를 열망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으나,

리스트가 사회적 계급제도를 고치려고 하지 않고 다만 좌석의  배열을 고쳤을 뿐이라고 한다면 부당한 일이다.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괴테나  베토벤으로부터  셰익스피어, 단테, 미켈란젤로, 호메로스 등

사회적 제여건을 초월하여  예술의 날개를 타고 파르낫소스에 도달한 사람들을 영웅으로서

숭배했는데 세간의 일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영웅을 찾았다.



리스트는 그 시대의 바로 그런 사람으로  그의  뛰어남과 어리석음이 모두 합친 낭만주의의 화신이었으며,

왕후와 교제하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대단한 초인이었다.



그의 음악은 낭만파 예술을 요약한 것이었으며,

베를리오즈의 신 같은 광기, 쇼팽의 귀족적인 시정, 멘델스존의 쾌적한 도회성, 슈만의 뜨거운 내성 등을 포함한 것이었다. 그에게 빠진 것이 있다면, 예(藝)를 극한 배우의 확신을 가지고 연기하거나,

당할 자 없는 화려한 연주로써 사람을 현혹시켜 버리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전설이 생기고 자라나는데, 음악의 장래에 영향을 미친 작곡가였던 그

를 장사지내고 말았던 것이다. 원숙기 초기에 그는 베토벤 후기의 작품에 도전하였

고,  마침내는  그  자신의  말을  빌린다면 "미래를 향하여 멀리까지 창을 던졌던

것"인데 그 창이란 만년에 있어서 시대에 앞선 실험적인 시도였다. 그는 아주 다방

면에 걸쳐 일을 했으므로 작곡가 이외의 피아니스트, 지휘자, 교사, 프로모터의 경

력에 관해서는 일일이 설명할 수 없다. 더욱이, 연인, 여행가, 낙천가의 면에 관해

서는  다  쓸 여유가 없다. 가장 열렬한 리스트 애호가라도 그렇게 세세한 것은 쓸

필요성이  없음을 인정하겠지만 그 사정의 장애가 되는 것은 이전부터 있었던 일인

데 그의 편을 드는 사람과 분개하는 도덕가들 사이의 심히 대립하는 주장과 유포된

편견이다.

    

    이러한 스케일이 큰 인물, 국제적 명사는 리스트 이전의 음악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다. 분명히 헨델과 하이든(만년의)에게는 영광의 시절도 있었으나 음악의 역사

는  그때까지는 고용된 근면한 음악가들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어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급료 때문에 특권적이며 폐쇄적인 지역사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작곡을 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과해진 평범한 일에 비범한 창조적 재능을 불어 넣은 것은, 뜻하

지 않게 후세의 사람들에게 은혜가 된 것이다. 리스트가 무대에 등장한 것은「예술

을  위한 예술」이라는 생강이 차츰 인정받게 되고서부터이며, 철도가 발달하고(장

거리  여행이 가능하고), 많은 청중이 생겨났는데, 그 다수화한 청중이 슈퍼스타를

갈망하는  소리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리스트는 각지를 뛰어 돌아다니는 독주

의 거장일 뿐만 아니라, 허리우드의 영화 배우나 전후의 로크 아이들의 원형이기도

했다. 넥타이를 300개 가지고 싶은 꿈을 자랑하던 소년이었던 그가, 영웅숭배의 대

상이  되는  인간에게 있게 마련인 교만과 탐욕의 유혹에 저항했다고는 할 수 없으

나,  그러면서도 고독이나 수도승의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는 마음은 10대부터 있었

다.  그것은 차츰 강해져서 만년에는 지배적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보다 자유롭

고  심리학적으로 방향이 잡혀진 시대라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된 그의 성

격도(이것이  그의 옹호자와 그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을 다 자극하는 것이지만) 받

아들여질  수도 있고 이해도 될 것이다.  자기 애들은 돌보지도 않고, 동료 음악가

들에게는  한없이  친절하고 사심 없는 아량을 보이고, 사례금을 받지 않고 장기간

가르치기도  한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그는 17세 때에 성인의 생활을 동

경하여, 가능하면 순교하고 싶다고 할 정도여서, 결국 50대에 성직에 나갔다. 그런

데 그의 애정생활을 성인은 커녕 때로는 더욱 문란해졌다.

    

    마찬가지의  모순은  그의 음악에도 많다. 그의 원악의 대부분은 야하고 저속한

취미에 열을 낸다고 혹평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음악을 많이 작곡했는데 그의 교

회음악은  엄숙하고 단조로워서 청중을 얻지 못했다. 그의 많은 악기작품에는 경건

과  관능적인 성격이 이웃해 있다.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에 있어서도 범용하고 거

창한 경과구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가장 보잘 것 없는 작품 가

운데도 비상한 아름다움과 영감이 풍부함을 지니고 있었다.

    

    인간적인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함께 이렇게 다양한 천재적 재능을 하늘에서 부

여받은 사람은 의심을 받고 적의로서 대해진다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리

스트의  경우  그 다양한 재능은, 감정이나 경험을 예술 속으로 가져오는데 한계를

모르는  낭만주의의  기수로서의 그의 운명에 멋지게 들어맞았던 것이다. 낭만주의

음악의  흐름의 끝에서 말러의 신성한 교향곡은 우주적인 경험을 하나의 작품에 꽉

꽉  채워 넣기를 바랐으나, 그것은 리스트의 무한의 개념의 연장선상에 있다. 《순

례의  해 첫 해》속의 한 곡에 바이런의 시의 다음과 같은 인용을 머리말로서 붙였

을 때 그는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기 안에 살고 있

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것의 일부가 된다."

    

    

    출생과 소년시대

    

    프란츠(페렌츠)리스트는 11811년 10월 22일에 헝가리의 도보르얀 마을에서 태어

났다.  이곳은 당시는 리이딩이라는 독일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전설을 좋

아하는 사람들은 1811년은 혜성이 나타난 해였다고 해서, (그것은 사실이다) 그 사

내  아이의 혈관에는 귀족의 사생아이거나 집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이것은 사실

이  아니다) 은근히 비친다.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광대한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영

지에서 재산관리인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추어 첼리스트로서 하이든과 훔멜과도 아

는 사이였다.

    

    리스트의 비상한 재능은 5, 6세 때 피아노의 의자에 처음 기어올라간 그 순간부

터 나타난 것 같다. 그의 아버지는, 이 아이의 재빨리 움직이는 손가락으로 집안의

재정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곧 깨닫게 된다. 1820년에 그는 에스테르하지 후작의 궁

전에서 열린 헝가리 고관들의 집회석상에서 아이를 소개하고, 그 결과 프란츠의 음

악교육에 필요한 연간 600굴덴의 기부금을 얻었다.

    

    그래서  집을  빈으로 옮겼다. 프란츠는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므로 칼 체르니가

당시 그의 피아노 교사의 역할을 이어받는다. 연령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아버지 아

담 리스트가 가르치지 못한 「버릇」을 들여준 것은 행운이었다. 그의 전설적인 테

크닉의  기초는 그2년 동안에 쌓아진 것이라고 리스트는 후년에 말하고 있다. 소년

리스트가  빈에서 슈베르트를 만날 수는 있었겠으나, 현란한 연주회 뒤에 베토벤이

스테이지에  올라와 신동 리스트에게 입을 맞추었다는 것은, 선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베토벤은 당시 사생활이 혼란하여 콘서트에는 결코 나가지 않았

다(연주를  들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귓병은 악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입맞

추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특히 그가 지독하게 싫어한 신동들에게는.

    

    1823년  말경에, 리스트 집안은 파리로 옮겼다. 그러나 원장 루이지 케루비니가

외국인의 입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교칙을 내세워 프란츠가 음악원에 입학하는 것

을 거절했으므로, 그는 소년 피아니스트로서의 경력에 발을 내디뎠던 것이다. 그로

부터  5년간,  그는 프랑스, 영국, 스위스의 상류계급 사이를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피아노를 치며 돌아다녔는데 그 사이에 집의 재정은 많이 불어났다.

    

    자기가 집안을 위해서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이나, 너무나도 쉬운 성공이 가져다

주는 굴욕에 대하여 어떤 반감을 예상할 수 있었으나 리스트의 반발의 격렬함은 보

통의 청년기의 반항적인 행위보다 훨씬 심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커스의 흥행이 끝

나는  시기가  왔다. 1827년 8월, 아버지 아담 리스트가 불로뉴에서 생애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때 그는, "여자에게 조심하라"고 아들에게 예언적인 경고를 했다고 전

한다. 아담의 아내는 오래 전부터 이런 생활에는 흥미가 없어 오스트리아의 친정에

돌아가  있었는데, 남편이 죽자 아들에게 달려와 파리의 몽톨롱가에 집을 장만하였

다. 프란츠는 우울증에 걸려 자기혐오에 빠지고 성직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 시

작했는데,  그 동경은 종교광이라고 할 정도이었다. 음악이 싫어져서「모욕을 당하

면서  많건  적건 벌어들이는 손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16세라

는,  활동을  시작하기에 아주 좋은 나이에 공적인 생활에서는 물러 앉아 피아노를

가르치면서  부의 제단에 희생으로서 바쳐져 왔던 자신의 교육을, 어찌해서라도 회

복하려고 열심히 책을 읽었다.

    

    몇  달이 채 안가서 그의 아버지의 임종 때의 예감이 현실이 되었다. 그의 제자

의  한 사람인 16세의 대신의 딸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카롤린 드 생-크

리크와의 사랑은 첫사랑이었는데, 아마 그 때문에 그의 정열은 오래 지속되었고(그

는  유언으로  그녀에게 반지를 남겼다), 가장 순수했음에 틀림이 없다. 생-크리크

백작은  새벽 2시까지 딸의 음악 레슨이 계속되는 것을 알고 당장 리스트를 쫓아냈

는데 그 때문에 리스트의 우울병이 심해져서 한때는 죽은 것으로 여겨져 파리의 신

문에 부고가 나왔을 정도였다.

    

    

    마리 다구와의 사랑

    

    2년의 세월이 흘러 리스트는 이 신경적인 허탈상태에서 완전히 회복되어 18세로

서 그리스 신화의 아도니스와 같은 핸섬한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귀여운 리스트」

를  잘  기억하고  있던 파리의 사교계에 자신을 가지고 출입하게 되었다. 그 뒤로

10년  동안, 그는 파리 예술계의 거물들과 알게 되었는데 그 중에는 위고, 발자크,

뮈세,  하이네, 비니, 들라크르와 등이 있었다. 그는 베를리오즈와 긴 교우를 맺고

쇼팽을 알게 되는데, 쇼팽과의 관계는 그리 친밀하지는 않았으며, 나중에는 멀어지

고  만다. 그런데 1830년대에 음악적인 경험 가운데서 리스트에게 예언적인 계시처

럼 되었던 것은 이탈리아의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의 귀신같은 묘기였다.

리스트는  최면술에  걸린 사람처럼 되어 파가니니에 필적한 만큼 피아노에 숙달할

것을  맹세한다.  그는 집에 틀어박혀서 하루 14시간이나 연습을 했다. 파가니니의

주제에 기초를 둔 1832년의 작품《파가니니의「캄파넬라」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

》은 피아니스트와 피아노라는 악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여 초월적인 피

아니즘의 새 시대의 새벽이 되었던 것이다.

    

    이 강박관념에 빠져 있는 것 같은 상태에서 일시적으로 그의 기분을 돌려 준 것

이  여성이었다  해도 의외는 아니다. 그는 1832년 연말쯤 다구 백작부인 마리에게

소개되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었으나, 혁명 후의 파리의

사교계나  보히미안 사이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었으며 어쩐 셈인지 10년이나 계속

되었다.  마리 다구는 이 해에 28세로(리스트는 22세), 14년 연상의 범용한 정치가

와  결혼하여 두 아이가 있었다. 1835년에 가족을 버리고 스위스로 달아났을 때는,

그녀는 리스트의 결정적인 배우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녀와 리스트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이 중의 첫 아이는 스위스에서 출생했다. 리스트는 당시 종교적인 감정이 고

양하는  위기에 빠져 있었는데, 파리에서의 사교생활을 버리고, 제네바에서 가르치

며  로맨틱한 정열에 빠져 있었다. 두 사람은 바이런이나 실러 같은 낭만주의의 사

도들의  작품과  함께  올림포스의  신들과 같은 단테와 페트라르카의 작품을 읽고

1835년부터  39년에 걸쳐서는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널리 여행했는데, 때로는 단 둘

이서, 또 때로는 그들과 생각이 같은 자유로운 사상의 주인공들, 권태로운 귀족들,

혹은 조르즈 상드와 같은 완전한 보히미안적인 지식인들과 같이 지냈다. 상드와 리

스트의 사이는 친밀했지만(거의 틀림없이) 플라토닉한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

    

    리스트의  자유롭고 지적인 호기심은 생 시몽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주의에 이르

기까지의 온갖 종류의 자극을 지칠 줄 모르고 받아들였다. 그 어느 것도 그는 참으

로 이해하거나 평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음악에 다소간의 반영이 보인다. 그

는 보편적인 진리보다는 경험을 추구하고 있었다. 하이네에게서 「풍향계같이 방향

을  바꾸는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반박했

다.  「그  불쌍한 음악가는」정치적 책임이라는 무거운 짐은 없으며, 문장에 의한

것처럼 설득력을 가질 책임도 없으므로, 「별로 후회함이 없이 지적 호기심에 몸을

내맡길  수가  있으며, 빛이 들어온다고 생각되는 방향이면 어디로나 향할 수 있다

」.  그의 내부에는 이상한 신비론자 라믄네 신부의 영향이 가장 오래 지속되고 가

장  깊이 침투하고 있었다. 라믄네는 갑자기 금욕주의로 깊이 기울여졌는데, 그 금

욕주의는 리스트의 화려한 외면 밑에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리스트의 라믄네에 대

한 열정과 존경은 거의 우상숭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브리타니의 신부의 집

을 몇 번 찾아간 것도 순례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

    

    리스트가  들어 앉아서 내성하고 싶다는 충동을 만족시켜 버린 뒤에는, 마리 다

구에게는 리스트를 집안에 붙들어 매둘 만한 기회는 거의 없었다. 그녀는 음악적으

로 교육을 받고는 있었지만 그녀의 분명히 속물적인 감성에서 본다면, 극장이나 콘

서트홀에서  낭만주의를 표명하는 것보다는 낭만주의의 내적인 측면을 더 좋아하였

다.  그녀의 리스트에 대한 애정은 처음에는 권태로운 돈 많은 여자의 바람기의 소

산이었다.  이윽고 애인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욕심에 빠지고 마는데, 그 애인의 매

력은  공중을  끌어당기는 카리스마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소원은 본디

가망이 없는 파멸적인 것이었다. 리스트로서는 세계는 정복당하기 위하여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의 피아니스트로서의 승리는 마리에게 심한 질투심을 일으키게 하였고,

그 질투심을 비록 그의 부정한 행위에 의해서 불붙은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치명적

인 것이었을 것이다.

    

    퀼른과 코블렌츠 사이에 있는 라인간의 섬 휴양지 노넨베르트에서 지낸 여름 휴

가는 그들의 허물어진 관계를 잠시 낫게는 하였지만, 마침내 1844년 신랄한 말다툼

끝에 헤어지고 만다. 2년 후에 분개한 마리는《넬리다》를 출판했는데 이것은 그들

의 연애를 거의 수식없이 쓴 소설이다.

    

    「넬리다」는  리스트의  명예에 상처를 주었는데, 바람군이라는 악명은 마리나

카롤리네  자인-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과의 오래 지속된 관계보다는 오히려 상대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의 정사가 많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그는 여성에게는 온갖

매력을  갖춘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고르는 데는 사려분별이 없었던 것이

분명하며,  과거의 실수에서 배우는 바도 없었다. 1840년대 초의 몹시 성가시고 직

업적으로도  상처을 받았던 댄서이며 여배우였던 롤라 몬테스와의 사건도, (60대의

그에게) 정상을 벗어난 노출증환자로서 자칭「카자흐 백작부인」이라고 한 올가 아

니나와의  거의 파멸적인 정사를 피하는 데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리스트의 성

적인  면의 태도나 동기를 분석하려고 하는 시도는 지금까지도 그 주제보다는 오히

려 사건의 재미에 눈을 돌리게 해 왔다.

    

    마리  다구와의 불화가 처음으로 심각한 양상을 보인 것은 1839년이었다. 이 해

에  리스트가 유럽의 콘서트홀 원정에 나선 것은 그런 뜻도 있으나, 그것으로써 그

는「사상 최고의 피아니스트」로서 아무도 군말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파리에

서의  그의 명성은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갑자기 인기가 올라간 라이벌 탈베르크를

누르기 위해서 그는 이미 1836년 도피처에서 파리로 돌아가 승리를 거두었었다. 그

런데 이제 그의 목표는 유럽 전대륙이었다. 1839년부터 47년에 걸쳐 그는 빈으로부

터  마드리드, 아일랜드에서 러시아의 먼 지역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발자취를 남겼

다.

    

    빈에서 6회의 콘서트가 끝나자, 그는 어린 시절 이후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

향엘  갔다. 코슈트의 반란으로 치닫던 이 시대, 헝가리는 국민적 영웅을 갈망하고

있었는데, 리스트는 그 요구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서 신이 보내준 사자로 생각되었

다.  헝가리말을 몰랐지만, 리스트는 늘 하는 식으로 배우같이 애국자의 가면을 썼

기  때문에 그가 가는 곳은 어디서나 축연이 베풀어졌다. 그는《라코지 행진곡》의

위세당당한  편곡으로서 민족적 정열을 열광적으로 높여 갔다. 군중을 흥분하여 환

성을 지르고 귀족은 그에게 명예의 칼을 증정했다. 그런데 그는 정치적이나 문화적

으로도 이러한 칭찬을 받을 자격은 없었다. 아마 이것을 그도 인정하고《헝가리 민

속  선율》의  작곡에 착수한 듯하다. 이 곡은 뒤에 고쳐 써서《헝가리 광시곡》이

되었다.  이 음악은 헝가리 민속음악의 원형을 더 이상 깨뜨리려고 해도 깨뜨릴 수

없을  정도로 해서 사용하였다. 그가 헝가리 민속음악의 대표라고 생각했던 유랑집

시악단은,  실은 아마추어 작곡가들에 의한 포퓰러 음악의 제작소와 같은 일단이었

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헝가리 광시곡》의 매력이나 화려한 빛이 줄지는 않겠

지만, 바르토크나 코다이 시대까지 남아 있던 헝가리의 민속예술의 관한 오해를 크

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리스트는 언제 어디서나 청중은 자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

다. 이어 그는 유럽대륙의 횡단 연주여행으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 본의 베토벤 기

념비나  도나우강의 홍수의연금 같은 자선사업에도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런데 스

타의  자리에서의  경험은 모두 화려함과 어리석음이 가미된 것이었다. 어떤 때는,

그는 스테이지에서 당당하게 내려와서 귀족의 팬 사이로 끼어 들었을 것이요, 어떤

때는  무뢰한인 발라드 가수 존오를란도 파리와 함께 아일랜드에의 엉뚱한 원정 여

행을 떠나는 것과 같은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리르트의 음악성

    

    리스트가  도대체 어떤 연주를 했는지, 그가 어떻게 청중을 사로잡았는지는, 영

구히  추측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계속 풀 수 없은 수수께끼이다. 그의 테트닉

은, 그 절정기에는 정말 초인적이었다는 것은, 훔멜이나 모셰레스와 같은 사람들의

고전적인 스타일을 그가 일소해 버렸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논의할 여지가 없으리

라고 생각된다. 그의 피아노에의 접근은 오케스트라적이었다. 그래서 열 개의 손가

락이 100명의 연주자가 만들어내는 하모니를 재현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온건한

비평가 찰즈 할레경도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의 리스트에 의한 피아노편곡은

오케스트라의  오리지날보다 훨씬 사람을 크게 감동시킨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뒤

에 경험 많은 감성적인 음악가들이 꼬집어 말 할 수 없었던 것은 베를리오즈가「예

견적인 감성」이라고 부른 그의 예술성과 연기능력이었음에 틀림없다. 리스트의 최

후의  제사의 한 사람이었던 알렉산더 실로티는 가장 불충분한 악기를 연주했을 때

조차,  스승이 피아노에서 끄집어내는「상상도 할 수 없는 효과」를 쳐 보라, 얘기

해 보라는 청을 받았을 때는 당황해 버리고 만다고 고백하고 있다. 하이네는 늘 인

간  리스트에게 신랄한 비평을 퍼부었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리스트에게는 완전히

항복하고  있었다-「피아노가  없어지고-소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도 그의 태도에는 혐오를 느꼈다. 멘델스존, 슈만, 쇼팽은 모두 리스

트의  연주에, 마치 요술에 걸린 듯 빠져 버렸다고 적고 있으면서도, 동업자로서의

리스트의  통속성이나  쇼맨십에는 악의를 품고 있었다. 요아힘은 리스트가 악보에

보태기를  하거나  장식이나 즉흥적 대위선율 등을 보태는 버릇이 있다고 한탄했는

데, 그러한 발언과 베토벤의 힘찬《함머클라비르》의 연주에 관한 베를리오즈의 기

술-「한   음도   빼지   않고,   한  음도  보태지  않았다(악보를  들고  음표를

따라갔는데)」-하고는 어떻게 일치시키면 좋을까?

    

    리스트의 청중 대부분은 음악적 소양이나 식별력이 없어서 곧 색다른 현상에 어

리둥절한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영국이나 독일의 보다 진지하게 음악적으

로 교육된 중심지에서는 다른 고장에서보다 분명히 과묵했는데 그것은 하나는 음악

적으로도,  모랄상으로도 그곳 사람들이 본래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

이다.  설사 그의 스테이지 매너나 무대에서의 행동이 너무 거창했다 하더라도, 그

의 성공은 트릭이나 겉보기에만 바탕을 두고 있었다고 추측할 일은 아니다. 청중을

즐겁게  하고 감동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육한다는 책임을 그는 개인적으로 의식하

고 있었다. 그의 프로그램에는 바하나 슈베르트의 작품, 베토벤의 후기의 작품《반

음계적  대갈롭》이 같이 들어 있었다. 그의 어지러울 정도의 패러프레이즈나 편곡

은 가극장의 매력이나 흥분을 재현했을 뿐 아니라, 베토벤의 교향곡을 많은 사람에

게  소개하는  공적을 세웠다. 당시는 그의 편곡이 없으면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이 많았다.

    

    리스트는 어디서보다도 러시아에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갑자기 연

주여행에  막을 내린 것도, 이 러시아에서는 1847년의 세 번째 방문 때였다. 또 카

롤리네  자인 비트겐슈타인과의 관계가 시작된 것도 이 세 번째 여행 때였다. 그녀

는  그후 15년 동안 그의 애인이 되었고, 그리고 죽을 때까지 좋은 친구였다. 리스

트는  2월의 키에프에서의 자선연주회 후에 공작부인을 처음 만나, 그의 연말에 걸

쳐서 우크라이나의 보로닌체에 있는 그녀의 영지에서 몇 달 동안 지내는 사이에 그

들의  관계는 깊어진 것이다. 그들의 연애사건은 처음에는 비열한 비판의 과녁이었

다.  표면적으로는  돈 후안형의 리스트와, 신앙심이 두텁고 수줍음을 타며 건실한

카롤리네의 결합에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데가 있었다. 그녀는 아름답지도 않고 우

아하지도  않았고, 어렵고 난해한 문학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뛰

어난 저작인 「교회의 외적 약점의 내적 원인」은 24권에 이르고 있다. 집시음악과

쇼팽에 관한 리스트의 저서의 집필에도 확실히 그녀가 도와준 흔적이 있다(어느 정

도인지  확인할  수는 없다). 공적으로는 결코 나타나지 않은 리스트의 보다 깊은,

보다  좋은 면에 그녀는 호소한 것이었다. 리스트의 성격의 이러한 면은 조르즈 상

드를  자극하여, 「그는 남 모르는 고뇌로 고생하고 있다」고 말하게 하였으며, 그

를  종교적인 위기와 의기소침에 몇 번 빠지게 한 것도, 또「시대의 첨단을 가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화려한  스타의 자리를 버리고 작곡과 음악 예술의 추진에 몸을

바치려고 결심하게 한 것도 그의 이런 측면이다.

    

    이런  생각은 일찍이 1842년에는 그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이해에 그

는 바이마르 궁정에서 음악을 감독하기 위해서 잠정적인 계약서에 서명했다. 그 계

약은 바하나 하이든에게 했던 것보다는 훨씬 경의에 찬 어휘로 표현되어 있었던 것

은 당연하지만, 악장이라는 직은 분명히 비낭만적인 후퇴였다. 급료는(리스트가 볼

때에는)  웃음거리밖에 안 되었지만, 비르투오소로서 지낸 수년간에 상당한 재산을

모았기 때문에 그의 결정은 금전적 문제를 떠났던 것은 확실하다. 그는 이제 그 지

위를,  새로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한 안정된 기반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최초의

예상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면적으로 새 일에 열중하였다. 이 새로운 생

활에서는  그가 카롤리네를 정식 아내로 맞을 작정이었던 것은 거의 의심의 여지가

없다. 1848년에 그들은 바이마르의 알텐부르크에 집을 마련하고 몇 해나 결혼에 관

해서 진지하게 상의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결혼은 공작부인이 이혼 할 수 없는 한

전혀  불가능했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일족의 음모(그들은 러시아 황제의 지지를

얻었다)와  바티칸의 이해할 수 없는 수속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의 가능성은 자꾸

후퇴했다. 그런데 1864년에 니콜라스 자인 비트겐슈타인공이 타계하여 비로소 장애

가  모두 제거됐을 때에는 리스트가(딸 코지마에 의하면「장례식을 기다리듯」자기

의 결혼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결혼할 마음이 없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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